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드리 헵번 (문단 편집) === 세기의 연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65.media.tumblr.com/tumblr_mdc1z2sui21rr6fg8o1_500.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49aa0c53d02f030d711208d557d08d19378719d26d1343333a0e7604409c4f4a.gif|width=100%]]}}} || || {{{#fff '''지지(Gigi)에서의 오드리 헵번'''}}} || {{{#fff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헵번'''}}} ||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연극 [[지지#s-8]]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상류층 여성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카프라|프랭크 캐프러]] 감독[* [[윌리엄 와일러]]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거장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무려 3번이나 거머쥔 위대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멋진 인생]]의 감독으로 유명하며, 이 감독의 페르소나가 바로 '''[[제임스 스튜어트]]'''이다.] 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먼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영화의 주요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단 하루라는 것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나온 아이디어.]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촬영 도중 헵번의 스타성을 직감한 [[그레고리 펙]]은 헵번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같이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달라고 에이전트에게 요청했다.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셈이다."[* 그레고리 펙은 할리우드에서 드문 진짜 대인배 인격자로 유명했다.]라면서. 에이전트는 만류했지만 그레고리 펙은 강경했다. 그의 예상대로,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hedivineaddiction.com/Audrey-Hepburn-Sabrina1-1.jpg|width=100%]]}}} || 이후, 오드리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영화)|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여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 이 당시 로마의 휴일이 프랑스에서는 아직 개봉전이어서 헵번은 무명인지라 지방시 외에는 의상협조에 나선 프랑스 업체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방시의 설립자 [[위베르 드 지방시]]도 그녀가 캐서린 헵번인줄 알고 제안을 수락했다고. 처음에 그녀를 만난 지방시는 크게 실망해서 기성품이나 쓰라고 했었지만 그녀가 옷과 액서사리 등을 고르는 모습과 말하는 모습 등에서 빛남을 느꼈고, 생각이 180도 바뀌어서 이후 그녀의 모든 영화에 의상협찬을 하였다고 한다. 둘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오드리가 죽기 직전 미국에서 스위스로 가는 걸 도운 것도 지방시였다. 암 말기여서 스위스까지의 여행을 버텨내지 못 할 거라는 진단이 나오자 전용기에 의료장비까지 구비해서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도왔다고 한다.]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 큰 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 단 오드리는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영화,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romthebygone.files.wordpress.com/ah-ondine3.jpg|width=100%]]}}} || 사브리나 출연 직후 오드리는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하였다. <운디네>는 [[1954년]] [[2월 18일]]부터 [[1954년]] [[7월 3일]]까지 상영되었으며 이 연극으로 오드리 헵번은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6.fanpop.com/Audrey-Hepburn-in-black-funny-face-32252973-500-660.jpg|width=100%]]}}} || [[1957년]], 오드리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 오드리 헵번은 노래실력도 괜찮아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 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고 동화 오디오북도 녹음해서 이 오디오북으로 그래미를 받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훗날 명곡의 반열에 든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부르기도 했다.]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오드리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59년]]에는 [[파계(미국 영화)|파계]]에서 수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60년]]에는 서부극인 용서받지 못한 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이 아니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는 여배우들 중 최고참인 [[릴리언 기쉬]]가 67세의 나이에 출연한다.]에서는 인디안족 여인으로 나온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오드리 헵번/티파니.pn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irBWk-qd9A)]}}} || || {{{#fff '''[[Moon River]][*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노래는 한번쯤 들어봤을만큼 유명한 명곡. 루이 암스트롱, 앨튼 존 등 전설로 불리우는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불렀으며 국내에서도 다양한 CF에 이 노래를 사용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지만 정작 이 노래의 원곡을 오드리 헵번이 불렀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오드리 햅번을 상징하는 음악으로도 유명하다.]를 부르는 오드리 헵번'''}}} ||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오드리 헵번은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전문으로 유명한 실제 브랜드이며, 영화에서 나온 그자리에서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직접 찾아가보면 영화를 추억하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은편.]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다만 오드리는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 너무 달라서 홀리라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이 배역 자체가 [[매럴린 먼로]]를 구상하고 만든 캐릭터였다. 원작자 트루먼 커포티가 매럴린 먼로와 친했는데 먼로의 화려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에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썼었다. 영화 캐스팅도 커포티는 당연히 매럴린 먼로를 원했지만 그 당시 연기적 변화를 원했던 먼로는 콜걸 캐릭터라는 얘기를 듣고 거절을 했고 영화사 측에서도 자주 지각을 하고 스캔들 메이커인 먼로를 감당못해 출연이 불발되어 오드리 헵번이 배역에 캐스팅 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octormacro.com/Annex%20-%20Hepburn,%20Audrey%20(My%20Fair%20Lady)_16.jpg|width=100%]]}}} ||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 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영화)|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줄리 앤드루스와 오드리 헵번은 사적으로는 매우 친했다. 줄리의 남편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연출한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이라 친하기도 했고, 줄리와 오드리는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가까운 곳에 두 집이 위치하여 자주 왕래하였다고 하며 오드리의 아들이 말하길 크리스마스에는 줄리가 동네에 조명을 설치하고 전기세를 다 부담하였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스위스 자택 쪽에서 마주친 줄리와 오드리.[br][[파일: julieaudrey.jpg|width=460%align=center]][br]또, 줄리 앤드루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 개봉 50주년 행사에도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영화가 워낙 오래 전 개봉하기도 했고 이 때 오드리 헵번과 영화를 감독한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사망한 상태라 영화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려줄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 줄리 앤드류스밖에 없긴 했다.) ]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213/0000766661|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일 때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 이런 현상은 오드리 헵번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스타배우들도 겪는 일이다. 특정한 작품을 통해서 확연하게 인지도를 쌓은 배우는 해당 작품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로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져서 배우 자신의 연기능력과는 별개로 대중들이 기존의 특정한 이미지만을 배우에게 과도하게 기대할 때가 많다. 특히 이는 장편 영화 시리즈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문에 작품이 완결된 이후로도 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인기의 절정에서 작품에서 하차하는 배우들도 많다. 해당 이미지를 지우기위해 기존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다양한 연기도전을 하게되는것은 덤이다.]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년]])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년]])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오드리 헵번은 평생 2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7년]] 개봉한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출세작 <[[로마의 휴일]]> 각본을 썼던 [[돌턴 트럼보]]가 원작인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1943)의 각본을 썼다. <[[영혼은 그대 곁에]]>의 각본을 쓴 건 제리 벨슨(1938~2001)이며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에서 트럼보와 공동각본을 썼던 프레드릭 H. 브레넌(1901~1962)이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리처드 드라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라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